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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국내 역사 사회 이야기

조선 개국과 고려의 멸망

by 쉼표 하나 2018. 3.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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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시대 상황

 

14세기 말 한반도를 지배하고 있던 고려는 혼란으로 가득한 상황이었다.

안으로는 귀족 세력인 권문세족과 그에 반발하는 신진 사대부들이 대립하여 정치가 혼란하였고,

밖으로는 홍건적과 왜구의 끊임 없는 약탈과 원나라에서 명나라로 교체되는 원명교체기의

혼란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 북방에 있는 이성계는 이민족의 침입을 지속적으로 물리치고 명성을 얻어 중앙 정계에서

힘을 쌓고 있었다.

 

그 무렵 고려는 철령위 문제로 밖으로는 명나라와 안으로는 친원파(원나라 우호 세력)와 친명파(명나라 우호 세력)가 대립을 하고 있었다. 그에 따라 고려는 요동을 정벌하기 위해 최영(崔瑩, 1316년 ~ 1388년)을 중심으로 요동 정벌군을 편성하였다.

 

요동정벌군이란?

 

이때 우군 도통사를 맡았던 이성계는 좌군 도통사 조민수와 상의하여 평양에 있던 최영에게 회군을 청하였다. 그러나 회군 요청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이성계와 조민수는 1388년 음력 5월 20일 군사를 수도로 돌려 쿠데타를 일으켰다.(위화도 회군으로 알려진 사항이다.)

 

고려의 주력군으로 구성되어 있는 요동정벌군이기에 쿠데타는 손 쉽게 성공할 수 있었고, 이성계는 모든 정권을 잡을 수 있게 되었다. 이성계는 우선적으로 최영 세력을 숙청하고 우왕을 폐위한 뒤 창왕을 왕위에 올렸다. 동시에 정도전 등 신진 사대부들과 손잡고 과전법과 같은 전제 개혁 등 여러가지 개혁을 단행했다.

 

우왕이란?

 

창왕이란?

 

이듬해에는 창왕을 다시 폐하고 공양왕을 왕위에 올렸다.

(이성계의 섭정 및 이성계 일파가 권력을 장악하였기 때문에 가능)

폐위의 사유는 폐가입진(廢假立眞)으로, 우왕과 창왕이 공민왕의 자식이 아닌 신돈의 자식이므로 폐하고, 진짜 고려 왕씨를 왕으로 삼는다는 뜻이었다.

또한 사전개혁(私田改革) 및 과전법(科田法)을 시행하였으며,

전제 개혁으로 인하여 이성계·정도전·조준 등은 막대한 과전을 받게 되었으나,

권문세족들은 농장을 몰수당함으로써 경제적 토대가 붕괴되었다.

한편 공전(公田)의 증대는 국가의 수입을 증대시켜 새로운 왕조 조선의 경제적 기초를 확립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던 중 1392년에는 이성계의 5남인 이방원이 정몽주를 제거하고 그해 음력 7월 17일 개경의 수창궁에서

공양왕의 왕위를 물려받아 새 왕조를 개국하여 태조가 되었다.

 

1393년 음력 2월 15일 나라의 이름을 고려에서 조선으로 천명하고 1394년 음력 1월에 한양(현재 서울)으로

수도를 천도하였다. 또한 고려 때 폐단이었던 불교 대신에 유교를 존중하여 이를 근본이념으로 삼으니, 불교는 점점 쇠퇴하여 천대를 받고 유교는 극진한 대우를 받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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